[이재용의 범죄/시사 칼럼] '화성연쇄살인사건' 불운의 미제사건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잡혔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은 6년간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반경 2km 이내에서 일어난 성폭행 결합 연쇄살인사건이다. 이 사건은 현재 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으로 불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경찰의 끈질긴 추적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지난 9월 18일 DNA대조를 통해 이춘재가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되었고 10월 1일 조사에서 이춘재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을 포함한 14건의 살인과 30여건의 강간 및 강간미수에 대해 전부 자백하였다. 게다가 이춘재는 이미 다른 살인사건(청주처제살인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왜 당시에는 이춘재를 잡을 수 없었는지 화성연쇄살인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범행은 1986년부터 시작되었다. 1986년 4개월 동안 무려 4건의 살인사건이 한 읍내에서 발생하였다. 지금이라면 당장 연쇄살인사건이라 구분을 하고 수사를 진행하여 빠른 시일내에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지역 파출소장은 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범행이 연쇄살인사건이라는 것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고, 사건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사건현장을 훼손하는 등 수사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과학기술이 많이 발전하지 않았고 연쇄살인이라는 개념 또한 명확하지 않았으며 현장보존을 위한 장비나 기술도 매우 부족했다. 실제로, 당시 사건현장에는 머리카락이나 범인이 피우고 버린 담배꽁초 등 여러 증거가 많이 있었다. 이를 통해 범인의 지적 능력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 수 있었는데 당시에는 현장의 증거를 사건이 발생하고 한참 뒤에야 찾기 시작했고 시간이 많이 흘러 증거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점 국민들의 닦달이 심해지면서 경찰은 연간 총 205만 명의 인원을 투입하고 용의자만 21000명을 조사하는 등 대대적인 수사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인원이 증가함에 따라 수사는 더욱 더디게 진행되었고 목격자의 기억도 흐릿해지고 가장 핵심 목격자였던 버스기사가 사망하면서 결국 2006년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되었다. 경찰은 화성에 사는 25~35세의 모든 남성들의 사진을 목격자들에게 보여주는 등의 무식한 방법도 사용했지만 과학기술의 부재로 범인을 잡지 못했고 최근에서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의 경찰들을 탓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었다고 생각한다. 당시에는 머리카락 채취 등의 수사기법도 없었고 증거를 바탕으로 수사를 진행하는 것 자체에 굉장히 미숙했다고 한다. 알려진 정보에 따르면 당시 경찰들은 범인을 잡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경찰의 사건해결 압박으로 인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피해자가 발생하였고 현재 가장 논란이 되고 있기도 하지만 정확한 사실이 드러나지 않아 아직 의견을 주장하기에는 불분명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범인의 입장에서는 시대를 굉장히 잘 이용하였다고 볼 수 있고 경찰의 입장에서는 시대와 운이 굉장히 따라주지 않아 발생한 불운의 사건이다. 대한민국의 3대 미제사건이 전부 1990년대 초반에 발생했듯이 현재에는 미제사건이 발생하지 않을 정도로 수사기술이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이라도 사건이 해결된 것에 감사하고, 다른 미제사건들에 다시 집중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미제사건을 해결해준 경찰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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