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인터넷신문

그리스 철학의 정수를 엿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행복과 중용의 가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집대성으로 불리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그 아들 니코마코스가 그의 대화와 가르침을 엮어 그렇게 불리고 있다. 인류 최초의 윤리학 강론서라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역사를 아울러 가장 권위 있는 윤리학 저서이자 시대를 초월해 온 스터디셀러로, 오늘날에도 대학의 논술 문제와 학부생들의 훌륭한 벗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윤리철학에 관심이 있는 총명한 청소년은커녕,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이름이라도 들어 본 학생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이처럼 개탄스러운 사실에 나는 이 기사를 쓰게 되었다.

 

 총 10장으로 구성된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선(善)이란 무엇인가 문답하며 서장을 열고 있다. 선이란 무엇인가? 선은 수단적인 선과 목적으로서의 선으로 나눠볼 수 있는데, 우리 실생활에서의 학업 수행과 자기 계발은 수단적인 선이다. 결국 더 나은 선인 궁극적인 선,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

 

 행복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그 자체만을 위해 추구되기에 궁극적인 선이고 선의 도달점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야기하고 있다. 윤리나 사회 교과서에서 어렴풋이 이런 문구를 본 기억이 날 것이다.

“인간은 인간 고유의 기능인 이성을 가장 잘 발휘할 때 덕을 실현하며, 덕을 가장 잘 발휘할 때 행복이 달성된다.”

 그렇다면 덕, 탁월함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중용’으로 설명한다. 마땅한 때에, 마땅한 일에 대해, 마땅한 태도로 행동하는 것이 중용이라는 이야기다. 곧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탁월한 상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용기, 절제, 관후함을 예시로 들며 용기에서의 덕은 비겁함과 무모함 사이의 적절한 상태, 절제는 방종과 무감각 사이의 균형점이라고 말한다. 때로는 어느 한쪽에 약간 치우친 듯 보이면서도, 그 지점에서 가장 적절한 상태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이다.

 

 이 덕을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정의와 이성이다. 분배적 정의와 교정적 정의, 시정적 정의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관은 교과서를 통해 배운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행운, 부와 같은 외적인 행복이나, 단순히 즐거움을 주는 쾌락도 행복의 부분에 포함되기는 하겠지만, 근본적으로 태도를 통해 나타나는 품성의 덕과 그러한 덕을 실현하기 위한 본바탕이 핵심이라고도 그는 덧붙인다.

 

 철학과 윤리학은 우리 삶에서 동떨어진 것으로 쉽게 여겨지고 한다. 자연계와 수리과학에 특화한 남고인 부천고등학교의 특성상 그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져 보이지 않나, 하는 것이 개인적인 소견이기도 하다. 너무 딱딱하고 추상적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기출문제 지문의 만만한 상대라고 얕보기도 한다.

 

 그러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그보다 깊고, 부드럽고, 쉽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붙어볼 만한 상대다. 과학자이자 수학자로서도 시대를 대표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답게 체계적이고 정확하게 인생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

 

 오늘보다 더 나은 삶을, 조금 더 행복한 삶을 꿈꾸는 소년이라면 독서 기록장을 풍성하게 채우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여러분도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와 고대 그리스 윤리학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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