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채의 독서 칼럼]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과연 정당한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마이클 샌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 중 공리주의 부분에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라는 단편 소설이 소개되어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줄거리가 대단히 흥미로워 기억에 남았었던 부분이었다. 그러던 중 어슐러 K. 르 귄이 쓴 단편 소설집 ‘바람의 열두 방향’ 중의 한 이야기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실려 있어 읽어보게 되었다. 이야기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기, 유토피아같은 한 도시가 존재한다. 그 도시는 오멜라스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오멜라스에는 군주나 노예뿐 아니라 주식 시장이나 광고, 비밀경찰, 폭탄도 없다. 맑은 날씨와 환한 햇살, 즐거움으로 가득 찬 여름 축제, 하지만 오멜라스의 주민들이 누리는 모든 즐거움에는 한 가지 조건이 따른다.

 

 

“오멜라스의 아름다운 공공건물들 중 하나에 지하실 방이 있다. 아니 어느 널따란 개인 저택의 지하실일 수도 있다. 그 방에는 굳게 잠긴 문이 하나 있을 뿐 창문도 없다. (·····) 그 방에 어린아이 한 명이 앉아 있다. 그 아이는 정신박약아다. 태어날 때부터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공포와 영양실조, 그리고 아무도 돌보지 않아 그렇게 된 것일 수도 있다. (·····) 너무나 야윈 아이의 장딴지는 살이라곤 아예 없고, 배는 불룩 튀어나왔다. 자신의 배설물 위에 계속 앉아 있었기 때문에 엉덩이와 허벅지는 짓무르고 곪은 상처들로 가득하다.” (462p)

 

 

오멜라스의 모든 사람들은 그 어린아이의 이야기를 안다. 어린이가 자라 일정 나이가 되면,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 관행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 도시의 아름다움, 그리고 자신들이 누리는 모든 것들이 한 어린아이의 끔찍한 고통의 나날을 담보로 한다는 것조차 잘 알고 있다. 몇몇 사람들은 지하실의 아이를 직접 목격하기도 한다. 그 사람들은 충격을 받고, 가슴 아파하며, 분노를 느끼지만 그들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친절한 말 한마디라도 건넸다간 오멜라스의 행복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를 그 지독한 곳에서 밝은 햇살이 비치는 바깥으로 데리고 나온다면, 아이를 깨끗하게 씻기고 잘 먹이고 편안하게 해준다면 그것은 정말로 좋은 일이리라.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한다면, 당장 그날 그 순간부터 지금껏 오멜라스 사람들이 누려왔던 모든 행복과 아름다움과 즐거움은 사라지고 말게 된다. 그것이 바로 계약인 것이다.” (464p)

 

이런 끔찍한 모순에 직면한 뒤, 아이를 향한 부당한 행위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곧 현실을 알아차리고 순응하며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멜라스를 떠나는 이들이 있다. 오멜라스의 아름다운 관문을 통과해 혼자서 걸어가고는 오멜라스를 떠나버리고, 결국 영영 돌아오지 않게 된다.

 

“그러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는 듯 하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 (467p)

 

수업 시간에 서양 윤리 사상을 배우면서 공리주의에 대해 배웠었다. 최대 다수의 최대의 행복을 지향하는 그들은 다수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소수의 희생양이 나올 수도 있다고 본다. 그들이 보기에는 아이 한 사람의 희생으로 수많은 도시의 사람들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이 계약이 공리주의의 관점에 적합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다수의 이익이 아무리 중요하다 할지라도, 결국 한 아이의 인권조차 보장해 주지 못하는 사회가 과연 올바른 사회일까? 아무리 많은 사람이 행복하고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을지라도 결국 그 밑바닥에는 한 아이의 희생이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사람들이 누리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라 말할 수 없는 게 되어버린다. 공리주의자들은 행복은 선, 고통은 악이라고 정의한다. 특히 벤담은 그러한 공리(utility)를 극대화하는 행위라면 어떤 것이든 옳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아이의 행복은 작으니 무시하고, 아이의 고통으로 다수의 행복을 담보하는 행위는 절대로 도덕적으로 옳은 일이라 주장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오멜라스를 떠나는 이들이 나오는데, 나 역시 오멜라스의 주민이었다면, 그 사실을 알자마자 당장 도시를 떠나버렸을 것 같다. 나의 행복이 한 아이의 비참하고 끔찍한 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아 견딜 수 없을지도 모른다. 물론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아이를 바깥으로 데리고 나와 줄 용기는 없기 때문에 그저 방관자처럼 이 도시를 떠나고야 말 것 같다.

 

오멜라스 이야기를 보며, 우리 사회와도 닮은 점이 있는 것 같았다.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이 우리 사회의 지하실 속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수결의 원칙으로 대부분의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에서 때로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희생이 강요당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은 분량은 짧을지 모르겠지만, 그 속에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단편 소설이기도 하다. 당신이라면 오멜라스의 진실을 알고서 그에 익숙해져 살아갈지, 아니면 그 사회를 떠날 결정을 할지 궁금해진다. 공리주의는 여러 장점을 갖고 있고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통용되고 있는 원리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약자의 희생이 뒤따른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어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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