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서의 독서 칼럼] 모두를 위한, 모두에 의한, 모두의 양성평등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읽고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사회 운동가인 시몬 드 보부아르가 자신의 저서 ‘제 2의 성’에서 한 말이다. 우리가 성별에 따른 차이라고 당연시해온 것들이 사실은 사회에 의해 교육받은 것일지 모르며, 우리는 사회가 원하는 대로 ‘남성’답거나 ‘여성’답기 위해 길들어 왔다는 지적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이는 페미니즘에서 매우 강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은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에서 가장 논란이 되고, 지지를 받고, 반향을 일으킨 단어라고 생각한다. 한국 사회가 당면해있는 성차별 문제를 목격하기도 했고,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기사로 접하기도 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해 명쾌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라는 책을 만났다. 페미니즘은 역사가 짧지 않은 사회 이념인 만큼 그 이론서 역시 내용이 방대하고 딱딱할 거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책은 생각보다 두껍지 않았고, ‘모두를 위한’이라는 문구를 보며 페미니즘에 관심은 많지만 한 번도 제대로 파고들어 본 적 없는 내가 소화하기에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해 집어 들게 되었다.

 

이 책의 뒤 표지에는 이 책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문구가 있다. "명료하고, 간결하고, 쉽게 읽히는, 한 권으로 톺아보는 페미니즘 입문서." ‘톺아보다’는 샅샅이 더듬으며 살펴본다’는 뜻이다. 생소한 단어라 책을 펼치기 전 사전에서 톺아보는 것이 무슨 뜻인지부터 찾아보았는데, 책을 다 읽고 나니 문구를 작성할 당시 이 동사를 세심히 골라낸 출판사 직원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페미니즘이 무언지를, 항목과 이슈 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 말 그대로 페미니즘을 톺아보는 책이다. 임신 선택권, 외적 아름다움에 대한 여성의 의무감-우리나라에서는 ‘코르셋’으로 불리는-, 직장 내 성차별, 가정폭력과 같이 여성의 권리와 관련한 이슈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상당 부분 수면 위로 올라와 있고, 지금까지도 사회의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을 우리 사회에 대응시켜보고, 날카로운 지적에 깊이 공감하며 무거운 주제이지만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독자가 누구이든 간에 페미니즘이 주장하는 바에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도록 친절히 알려준다는 점이다. 페미니즘은 사회의 성차별에 반대하고 있으며, 평등은 어느 한 집단에만 이익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은 페미니즘을 여성 우월주의나 남성 혐오주의와 동일시하며, 덮어놓고 페미니즘은 그릇된 이론이라 말해버린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자주 겪었다며, 페미니즘을 모두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요령부득한 이론서가 아닌 안내서가 되기를 바란다고 힘주어 말한다. 서문에 등장하는 저자의 의도를 읽으며, 이 책이 성별이나 나이를 막론하고, 책 제목처럼 ‘모두’에게 읽히기를 바라게 되었다. 페미니즘이 역설하는 미래란 이상적이고 희망적이지만 페미니즘이 무언지 잘 모르고 있다면 양성평등은 계속해서 이상과 희망으로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더 많은 이들에게 페미니즘을 가르쳐주고, 사회를 평등으로 이끌어주는 책이라고 느꼈고, 저자의 의도대로 안내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 같아 기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대개 남성들이 바깥일을 도맡았을 때 여성들은 남성을 위해 집을 안락하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일을 맡았다. 여성에게 집이란 남편과 아이가 없을 때만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가정 내에서 여성이 온종일 다른 사람을 수발하느라 바쁘다면, 집은 그녀에게 쉬면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얻는 공간이 아니라 일터일 뿐이다."1 였다. 집안일에 대한 의무감은 사회에 진출한 여성이 직무를 유기하고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게끔 해 결국 가부장제로 돌아오게 만든다는 저자의 역설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는 대체로 집안일을 경시하고, 여성이 당연히 짊어져야 할 책무라고 보는 경향이 있다. 여성이 직업을 가지든 전업주부이든 그 사실은 쉬이 변하지 않으며, 남녀가 집안일을 분담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일을 남성이 ‘도와준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그 결과 여성이 아내나 어머니가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서 살아가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집안일이 가족 구성원 전체의 일이라는 지적은 매우 당연하지만 이미 뿌리내린 관념은 바꾸기 어렵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여성이 보장받는 권리가 늘어나게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단순히 여성이 직업을 갖게 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은 결혼이나 출산을 이유로 휴직, 퇴직을 강요받아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으며, 대한민국의 남녀 임금 격차는 37%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를 차지했다.2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고 있다며 성차별이 해소되고 있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냉정히 우리 사회의 현주소를 되돌아볼 차례이다. 우리는 여성을 누군가의 아내나 어머니가 아닌 주체적인 인간으로 보고 있는지, 남성과 동일한 노동을 했을 때 동일한 임금을 주는지, 집안일을 같이 하는 게 그저 ‘돕고’ 있지는 않은지.

 

반면 저자의 의견과 내 생각이 조금 다른 부분도 있었다. 저자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웠던 부분은, 외모를 꾸미는 것에 대한 여성의 압박감을 다룬 부분이었다. 저자는 사회가 여성에게만 더 엄격한 기준으로 외모를 평가하고 있고, 평가에 익숙해져 온 수많은 여성들은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이고, 불편함을 감수하고, 건강을 해쳐가면서까지 외모를 가꾼다고 지적한다.3 분명 맞는 말이지만, 이에 대해 저자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해결방안이 없어 조금 아쉬웠다. 저자는 여성들이 그러한 의무감에서 벗어나 사회 통념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사회에는 직장 내에서 복장을 자세히 규정하는 경우도 있고,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쉽게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여자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화장은 당연한 것이고, 불편할지라도 옷을 잘 차려입어 ‘예쁘게’ 보여야 한다고 배운다. 여자아이들을 주 소비층으로 삼는 장난감 중 화장품 놀이 등이 많다는 것은 이를 방증한다. 스스로를 옥죄는 잘못된 통념에서 탈피하는 일은 차별의 대상인 여성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어린 시절 보고, 듣고, 놀며 자연스레 습득하는 성 고정관념부터 손보아야 한다고 지적하며 ‘젠더 프리’ 교육에 대해 더 설명해줬다면 보다 많은 이들의 공감을 사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내가 더 성장했다는 느낌이 들어 뿌듯했다. 학생이긴 하지만 나 역시 사회의 일원으로서, 대두되고 있는 다양한 성차별 문제에 답답한 마음이 든 적이 많았다. 이 책을 읽으며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해왔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어 조금은 든든하기도 했고, 내 생각부터, 내 주변부터 바꿔나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나 또한 작지만 양성평등에 일조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어느 공동체가 미지의 지역으로 갈지 말지를 놓고 토론을 벌인다고 가정해보자. 그곳에 먼저 다녀온 선구자들은 그곳이 환상적인 곳이라며 사진을 보여주고, 자세한 설명을 곁들이며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다. 그러나 회의적인 사람들은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며, 그들의 말을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곳으로 가는 것 자체에는 동의하지만 변변한 지도가 없어 막연히 불안해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아직 갈 길이 먼, 성평등의 현주소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성평등으로 향하는 안내서의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양성평등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러나 양성평등을 위해 구체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우리는 아직 페미니즘에 무지하다. 무지함은 종종 막연한 두려움을 발생시킨다. 그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우리는 적극적으로 알아가려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 모두가 알고 있듯 평등은 어느 한 쪽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다. 공동체의 모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부조리함을 바로잡자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여성과 남성 모두를 위한 것임을 인식하고, 모두가 성평등을 위해 노력하고, 모두가 평등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바란다면,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을 읽어보기를 바란다. ‘모두를 위한, 모두에 의한, 모두의’ 양성평등을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및 인용 자료 출처]

1. 인용: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문학동네, 2018, p.101

2. 참고: https://www.yna.co.kr/view/AKR20190926151300004

3. 참고: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문학동네, 2018, p. 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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