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예윤의 독서 칼럼] Why Not Change The World

비키 오랜스키 위튼스타인의 ‘나쁜 과학자들’(다른)

과학 윤리는 서양에서 과학기술이 발달한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논란이 되는 것 중에 하나다. 현대 사회가 처한 여러 딜레마 중 가장 선택하기 힘든 것이 바로 과학 윤리에 관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생명 윤리를 지켜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인류 발전을 위해 생명 윤리를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할 것인가. 이 두 질문은 그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비키 오랜스키 위튼스타인의 저서인 ‘나쁜 과학자들’은 생명 윤리가 사라진 과학 연구의 참상을 보여준다.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알고 있는 비윤리적인 인체 실험, 예를 들어 나치의 유대인을 이용한 인체 실험뿐 아니라 전쟁을 위해서라며 애국심을 자극해 실험을 받게 했던 맨해튼 프로젝트 등등 다양한 인체 실험의 예시를 알려준다.

 

실험대상으로 인간 기니피그(실험에 자주 쓰이는 동물과 같은 취급을 받는 사람을 일컫는 말)가 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심히 고통스럽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실험대상으로 대한다는 것이 모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 괴롭게 느껴진다. 물론 인류의 선한 발전을 위해서라면 인체 실험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필수적으로 피실험자의 직접적인 동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런 절차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이라면, 여느 분야라도 지금과 같이 인류가 발전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딜레마로 인해 인체 실험의 참상을 알아갈 때마다 진이 빠진다.

 

이 딜레마의 해결책은 이 책에서 말한 바와 같이 ‘법적 절차를 준수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체 실험을 받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더는 살 희망이 없어서 산소호흡기를 중단하고 싶은 환자나 국가를 위해 불타는 마음으로 자신의 몸을 바치겠다고 하는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굳이 말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 요구하고 싶은 것은 바로 ‘가족이나 지인들의 동의’다. 만약 내가 피실험자의 가족이나 지인이었다면 그들 자신이 아무리 실험을 받기를 원한다고 한 대도 반대할 것 같다. 죽음에 더 아픔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죽은 사람을 바라보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고통이 크기 때문이다. 피실험자가 되기를 바라는 그 사람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피실험자의 가족과 지인의 인권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가족이나 지인의 동의까지 받은 후에 인체 실험을 시작하는 것이 윤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문제가 적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지구의 수많은 인간 중에서도 한낱 어린아이에 불과한 내가 이 문제의 해결방안을 생각한다는 것이 웃긴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 명의 작은 생각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아직도 비윤리적인 인체 실험은 복지가 잘 갖춰져 있지 않거나 발전했다고 인정받지 못하는 국가에 가면 행해지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선진국이라고 하는 국가의 사각지대에는 여전히 잔인한, 그 어떤 합법적 절차도 없는 비인도적인 실험이 가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작은 개인 한 명 한 명이 문제의식을 느끼고 해결하려 할 때 세상을 조금씩 바뀔 것이다. 그것에 앞서서 먼저 나 자신의 문제점, 예를 들어 인체 실험에 대한 안일한 생각이나 편견을 없앤다면 세상을 바뀌어 갈 것이다. ‘나’를 바꾸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길에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과학 윤리에 대한 딜레마는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살아가는 우리의 인식도 그대로여서는 안 될 것이다.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한 생명을 소중하게 대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의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생명 윤리의 딜레마, 그 속에서 당신은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가?

 

우리의 선택에 따라 세상은 바뀔 것이다. 그게 언제든지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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