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연의 사회 칼럼] 혐오와 차별의 시대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

 

 

혐오는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했으며 누군가를 차별하고 누군가에게 차별받는 일은 어느 곳에서나 일어났다. 노예제라는 단어 자체가 없을 만큼 노예제가 당연했던 과거가 있었고 그 누구도 반기를 들지 않을 만큼 여성 혐오가 당연했던 시대가 있었다. 그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혐오와 차별이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그 혐오와 편견 그리고 차별은 모습만 변형될 뿐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러므로 혐오의 시대란 비단 현재의 시대만을 정의 내린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혐오가 혐오임을 알고 차별이 차별임을 인지할 수 있는 때가 왔음에도 혐오와 차별을 해소하기는커녕 오히려 심화하는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혐오에 대한 원인을 파악하기가 더 어렵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더 어려운 혐오의 시대가 도래했다. 인종, 성별, 나이, 지역, 국가, 직업, 계층을 포함하여 언급하지 못한 많은 요소가 차별의 원인이 된다. 물론 혐오와 차별이 인간의 본성인가를 따지고 그것들이 사회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갈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여기에서 자세히 다룰 수는 없다. 다루고자 하는 것은 과연 현재 사회구성원들이 보여주는 ‘혐오를 대하는 자세’와 ‘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지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차별은 당하는 사람이 먼저 인지할 때가 많다. 즉, 차별하는 사람은 그것이 차별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차별의 관계는 다양하고, 일반화할 수 없는 예외의 상황들이 적지 않다. 먼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선량한 차별주의자’이다. 차별과 혐오가 나쁨을 알고 있고 자신은 나쁜 사람이 아님을 확신하고 싶은 사람들은 어디에선가 자신도 모르게 차별을 해왔다는 사실을 거부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 공존하는 사회 안에서 우리는 복잡한 관계망을 구성하고 있고 그 안에서 분명히 자신도 모르는 차별과 혐오를 행해왔다.

 

미국 드라마 ‘굿 플레이스’에서는 이제 현 사회구성원의 대부분이 천국에 가지 못한다며 두 인물이 대화하는 장면이 있다. 한 손녀가 할머니를 위한 장미꽃을 선물해 모두가 행복했음에도 노동력 착취 공장에서 제조한 휴대폰으로 장미를 주문했으며 장미를 산 돈은 인종차별주의자인 억만장자 CEO에게 갔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점수를 얻었다. 이렇듯 현 사회는 눈 앞에 보이는 것 너머에서 일어나는 나비효과가 존재한다. 특히나 차별과 혐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피해자는 반드시 존재한다. 우리는 모르는 새 행해진 차별과 혐오일지라도 이에 관심을 가지고 책임질 의무가 있다.

 

민주주의와 평등 사회라는 인식이 사회에 더 퍼질수록 사람들은 혐오와 차별에 대해 소리치기 더 쉬워졌다. 물론 아주 좋은 발전이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이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자신에 대한 혐오와 차별에만 집중하여 세상에 알리려 한다. 반면 남들이 받는 혐오와 차별은 묵인하고 방관하며 더 나아가 가세하기 시작한다. 혐오를 없애기 위해 표면적인 정책일지라도 시행하려 하면 곧바로 역차별이라며 반기를 들고 방해한다. 여성 혐오의 문제만 보더라도 너무나도 뿌리 박혀있는 과거로부터의 차별과 혐오가 당연하게 되고 이것이 잘못되었다 지적하려 하더라도 너무 적응해버린 사람들은 차별을 탈피하려는 움직임에 역차별이라며 훼방을 놓아버리고는 한다. 이로 인해 사회 속 여성 혐오와 여성 차별은 심화되고 고착화 된다.

 

이렇게 해서는 모두가 발전할 수 없다. 좋은 사람이길 원하고, 윤리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심리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자신이 했고, 하고있는 혐오와 차별을 없는 척하고, 되레 화내면서 척결을 위한 움직임을 방해할 게 아니다. 그동안의 과오를 인정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함께 해결책을 고민할 줄 알아야 한다. 쉬운 길을 아닐 것이다. 하지만 혐오와 차별을 공동의 숙제로 생각한다면 내가 하는 차별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조심하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내가 당하는 차별 또한 없어진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인간과 인간의 혐오하는 심리를 완전히 분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혐오와 차별이 있으면 안 되는 존재이며 적어도 없애겠다는 의지를 가진 채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모두가 약자이자 강자인 이 복잡한 혐오의 시대를 극복해야 한다. 중요한 건 경청과 수긍, 실천이다. 혐오의 근원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는지를 모두가 함께 고민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발전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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