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재의 역사 칼럼1] 영웅을 기리는 방법

우리나라의 독립 주권을 위해 헌신하신 애국지사들을 진정으로 기리는 방법은?

 “국권이 회복되면 나의 유해를 고국에 묻어달라.” 사형장으로 향하던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110년째, 우리는 아직도 그의 유언을 지키지 못했다.

 안중근이 한 첫 번째 독립운동은 ‘교육’이었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천주교 신자들 사이에서 자란 그는 어렸을 때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1906년에 삼흥학교를 세우고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국민 계몽(啓蒙: 열 계, 어두울 몽)에 앞장섰다. 그러나 더욱 강력해진 일본의 탄압을 피해 안중근은 11명의 동지들과 단지동맹(일본에 맞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안중근을 비롯한 12명의 지사들이 왼손의 약지를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는 혈서를 쓴 맹세로 유명하다)을 맺고 러시아 연해주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한다.

 그러던 와중, 그는 초대 통감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유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그를 죽일 거사를 계획한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그가 쏜 총알 7발 중 3발이 이토 히로부미에게 맞았고 그는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체포되었다.

 안중근은 러시아 검찰관의 예비 심문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로 “이토는 대한의 독립주권을 침탈하였기 때문에 대한의군참모중장으로서 총살한 것”이라고 밝혔으며 자신을 일반 살인 피고가 아닌 전쟁포로로 취급하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고, 1910년 2월 1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로부터 35년 이후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했고, 광복 이후 중국에서 귀국한 김구가 첫 번째로 한 일은 죽은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찾는 것이었다. 그 결과 서울 효창공원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일제강점기에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한국대표를 역임한 독립운동가) 의사의 묘가 조성되었으나 네 번째 묘의 주인인 안중근은 돌아오지 못했다. 또 1949년 김구가 암살되면서 그의 계획은 중단되었다.

 

  그 후 당시 뤼순감옥 소장의 딸이었던 이마이 후사코의 제보 사진으로 인해 그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고 2008년에 발굴 작업을 진행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2019년 현재, 뤼순감옥이 있던 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은 거사를 말리는 최재형(일제강점기에 러시아로 귀화한 후, 함경북도 경원 신아산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키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에게 “할 수 있습니다. 아니, 해내야만 합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정작 우리는 그의 유해를 찾아야만 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는 것일까. 1909년 안중근 의거, 1919년 3·1운동, 2009년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기념하는 ‘영웅’ 초연, 이후 미국(뉴욕)과 중국(하얼빈) 진출. 10년 후 2019년, 아직 이렇다 할 사건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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