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석의 의료/시사 칼럼] 안락사, 과연 이름 그대로 '안락'사 일까?

 

 

항상 윤리 의료 문제로 깊이 있게 토론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안락사'이다. 평소 안락사라는 것을 당연하고 대수 롭지 않게 여겨오던 사람들에게 안락사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글을 쓴다.

 

안락사의 사전적 의미는 “회복의 가망이 없는 중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인위적으로 생명을 단 축해 사망케 하는 의료행위. 안사술-존엄사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2600&cid=46625&categoryId=46625)" style="color: rgb(0, 0, 0);" target="_blank">(인용: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72600&cid=46625&categoryId=46625)이다.

 

과연 여기서 말하는 ‘존엄사’ 라는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 삶의 희망이 없고 고통뿐인 삶을 인위적으로 끝내주며 그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존엄사의 의미인가? 그렇다면 만약 그 안락사의 대상이 자신의 의사표현을 하지 못하는 뇌사상태 빠진 환자라면 어떨까?

 

뇌사란 ‘의학적으로 뇌의 기능이 완전히 멈춰 회복할 수 없는 완벽한 죽음의 상태’를 의미한다.(인용: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67033&cid=43667&categoryId=43667)

 

따라서 이 뇌사자는 스스로 생각할 수도 , 생명을 유지할 능력조차 없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더 이상은  없는 것일까 ? 또, 만약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없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이 뇌사자의 목숨을 완전히 끊을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것일까?

 

이 대답에 앞서 뇌사상태를 회복한 사례들을 알아보자. 벨기에의 한 남성은 뇌사판정을 받고 보호자의 동의에 따라 안락사의 대상이 될 수 있음에도 미동의로 23년 동안이나 병실에 누워지냈다. 그런데 이 환자는 23년 후에 키보드를 통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으며 더 시간이 지난 후에는 언론 인터뷰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었다. 이것을 단순 의료과실로 보았었지만, 이 환자는 처음에는 명확하게 뇌사상태였음이 밝혀졌고, 상태가 점점 호전된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것으로 볼 때 뇌사가 기적적으로 회복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참고: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0911241754595)

 

그럼 앞서 언급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해보자. ‘뇌사상태는 회복할 수 없는  죽음에 가까운 상태로, 이런 자를 다른 이가 안락사로 생명을 완전히 끊어버릴 권한이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예시와 같이 뇌사자가 회복된 사례가 있었다 . 이것이 기적이었든 무엇이었든 뇌사라는 단어의 사전적의미 자체가 모순되는 사례였던 것이다. 그러면 질문을 다시 만들어보자.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인격체에게 ’살인‘이 될 수도 있는 안락사를 허용해야 하는가 ?’ 라는 질문으로 말이다. 물론 뇌사상태에서 다시 본래 상태로 돌아오는 것은 기적이며, 그 가능성 또한 매우 희박하다. 또한  만약 그 기적이란 단어가 그 뇌사자에게 적용  되지 않는다면 의식도, 생각도 할 수 없는 한마디로 ‘시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의 현상을 병실에 지속해서 눕혀두는 것이다.

 

하지만 남겨진 가족과, 친구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그 기적이라고 불리는 것이 일어날 확률을 미지수로 둔 상태에서 그들은 그 확률을 포기할 수 있을까? 비록 그 병실에 누워있는 동안 들어가는 물질적인 소비가 헛수고가 될 수 있더라도 말이다 . 이 질문에 따른 대답은 사람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 사람이 살아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을 염두로 안락사를 선택한 것이, 적은 살아날 가능성을 염두로 살인을 선택한 것과 동등한 것이라고 필자는 이야기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 적은 살인의 가능성이 있는 안락사를 실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기적이라는 단어가 세상에 있다는 것은, 그 단어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살아날 가능성이 있는 가족을 주변 이들의 동요에 흔들려 포기하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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