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말있어요

일상의 자전 속 우리들은

신철규 시인 '슬픔의 자전' 감상

슬픔의 자전

 

 

신철규

 

 

지구 속은 눈물로 가득 차 있다

 

타워팰리스 근처 빈민촌에 사는 아이들의 인터뷰

반에서 유일하게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아이는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타워팰리스 근처를 둘러싸고 있는 낮은 무허가 건물들

초대받지 못한 자들의 식탁

 

그녀는 사과를 매만지며 오래된 추방을 떠올린다

그녀는 조심조심 사과를 깎는다

자전의 기울기만큼 사과를 기울인다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속살을 파고드는 칼날

 

아이는 텅 빈 접시에 먹고 싶은 음식의 이름을 손가락에

물을 묻혀 하나씩 적는다

 

사과를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끊어질 듯 말 듯 떨리는 사과껍질

그녀의 눈동자는 우물처럼 검고 맑고 깊다

 

혀 끝에 눈물이 매달려 있다

그녀 속에서 얼마나 오래 굴렸기에 저렇게

 

둥글게 툭툭,

사과 속살은 누렇게 변해가고

 

식탁의 모서리에 앉아 우리는 서로의 입속에

사과 조각을 넣어준다

한입 베어 물자 입안에 짠맛이 돈다

 

처음 자전을 시작한 행성처럼 우리는 먹먹했다  1

 

 

필자는 신철규 시인의 ‘슬픔의 자전’이라는 시를 함께 공유하고 싶다. 실제 신철규 시인의 시집 표제작으로 쓰이기도 한 위 작품은 문학 애호가들은 이미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시이다. 시라는 문학 장르를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굉장히 배울 점이 많았던 작품이었다.

 

우선 서사적 구도를 파악하기에 앞서 알아야 할 배경지식에 대해 살펴보자. 이 시는 서울의 타워팰리스 아파트 주변에 위치한 구룡마을을 배경으로 쓰인 작품이다. 구룡마을은 흔히 부자 동네라고 일컬어지는 강남에 있지만 유일하게 가난한 미개발 지역이다. 그만큼 부의 간극이 여실히 드러나는 지역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일까? 실제로 강남 도곡동에 거주하는 지인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근래에는 한창 천진할 것만 같은 유치원 아이들이 서로의 집안 경제력을 빠르게 파악하고 친구를 가려 사귀는 일들이 여럿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끼리만 모여 놀뿐더러 심지어는 평수와 층수까지 따져 자신과 같은 여건에 놓인 친구하고만 교제를 하는 분위기가 암묵적으로 조성된다고 한다.

 

작품에서도 위와 같은 사회문제를 현실적으로 다루고 있다. 구룡마을에 사는 것으로 추정되는 어린 주인공이 혼자만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시적 상황이 구현된다. 외톨이가 된 아이가 쉬는 시간, 떠들썩한 친구들 속에서 책상 모서리만을 보고 있을 이미지가 생생하게 연상되어 저도 읽는 내내 가슴이 뭉클해졌다. 특히 속으로 ‘왜 나만 초대받지 못했을까’라고 생각하는 아이의 심정을 ‘지구만큼 슬펐다’라고 표현한 대목이 가장 심금을 울렸다. 아이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지구는 엄청나게 거대한 존재이며 그 크기와 무게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한 공간일 것이다. 따라서 지구만큼의 슬픔이라는 것은 아이에게 있어 단연 한도 초과의 설움으로 다가올 것이다. 제 3자인 독자도 가난의 아픔을 아이들이 먼저 체감하는 비극적인 현실을 직면하는 것 같아 느끼는 지점이 많았다.

 

다음으로는 작품에 드러난 표현상의 특징을 파악해보자. 시인은 3연에서 조심조심 사과를 돌려 깎는 그녀를 보며 지구의 자전을 떠올린다. 필자는 사과를 돌려 깎는 행위를 지구의 자전에 비유해서 지구의 속도 사과의 속처럼 달콤했으면 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지구는 하루에 한 번씩 자전을 한다는 기정사실에 의거했을 때. 매일 반복되는 지구의 자전처럼 어떠한 무한 반복의 궤도 속에서 돌고 돌면서 결국엔 슬픔이라는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으로 이 시에서 흥미로운 요소 중 하나가 3연에서 등장하는 그녀가 크게 두 가지의 의미로 해석된다는 점이다. 하나는 지구만큼 슬퍼하는 아이를 앞에 두고 사과를 깎는 엄마로 해석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앞에서 나온 아이의 일화가 그녀의 과거라고 해석될 수도 있다. 어느 쪽으로 이해하든 충분히 잘 읽히는 시라 이러한 중의성이 독자로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또 8연에서는 깎은 사과 조각을 서로의 입속에 넣어주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사과=슬픔이라고 독해하면 슬픔을 서로 나눈다는 뜻으로 읽힌다. 우리는 일상에서 흔히들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라는 말을 많이 쓰곤 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시인은 은연중 슬픔이라는 것은 나누면 과연 반이 될까, 아님 두 배가 될까? 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따라서 슬픔의 공유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깊게 생각하게 만드는 가치 있는 시였다.

 

사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슬픔이라는 소재는 자칫하면 위험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불편한 소재가 될 수 있는데 이 시는 그런 면에서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던 시였다. 필자가 조사한 번외 정보에 따르면 신철규 시인은 실제 구룡마을의 아이들을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하고 실화를 바탕으로 ‘슬픔의 자전’이라는 작품을 창작했다고 한다. 시에 등장하는 ‘지구만큼 슬펐다’라는 표현도 구룡마을에 사는 아이가 인터뷰에서 직접 한 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작품에 더 애정이 갔다. 사람들의 무거운 이야기를 담아내는 문학작품에서 시인의 진지하고 진솔한 태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또 간혹 기성 시인의 시들 중 구조적인 측면에서 다소 난해하거나 한자어들의 빈도수가 많아 평소 문학을 심도 있게 공부하지 않은 문외한 일반인의 경우 난독할 가능성이 높은 작품들이 많다. 그러나 이 시는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깊게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라고 확신한다. 비교적 내용이해가 쉬우면서도 다방향 추리가 가능한 것도 시가 가진 강점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을 통해 독자는 카타르시스의 정서를 향유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위로받기도 한다. 필자는 이 시를 읽고 속에 있던 벅차오르는 감정들을 덜어냄으로써 어딘지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말해 여러모로 사유할 지점이 열려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점으로 성별과 나이를 불문한 많은 사람들이 문학이 가지는 의의를 다시금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올해  자전 속도는 그 어느 때보다 더딜 것 같다. 코로나 19로 일시 정지된 것만 같은 일상 속에서 오늘도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고 있을 것이다. 작품 속 내용처럼. 이번 여름, 우리가 작품을 통해 사과를 서로의 입속에 넣어줄 수 있는 용기를 터득한다면 어쩌면 슬픔의 자전은 멈출지도 모른다. 뜨거운 8월, 가슴 한쪽이 웅장해지는 신철규 시인의 시를 읽으며 마무리하는 것은 어떨까?

 

각주

1. 인용: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p.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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