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승연의 시사·문화 칼럼] 韓-中, 우리가 공유하는 기억의 이야기

 

20세기에서 21세기, 겨우 백 년이 지났을 뿐인데 세계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정보화 시대가 시작되었고 풍족한 재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불과 몇 십년만에 기적적인 성장을 이룩했지만 과정은 극히 힘들었고, 그 속에서 고난으로 점철된 한국 현대문학이 발달했다. 이와 비슷한 중국의 맥락에서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는 과거 정치와 문화 속 하위 계층 인간의 인생 서사를 펼쳐나간다. 이 책은 비록 허구적인 이야기이지만 하나의 '르포르타주'이다. 21세기 사람들, 특히 가까운 한국인에게 위화는 20세기의 기록을, 그의 기억을 건넸다.


무능력하고 어리석은 인물 허삼관은 전형적인 중국인의 얼굴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또 이 책은 한 자락 긴 민요라고도 말했다. 무지함과 부족한 형편으로 고초를 겪으나 부성애를 포함한 가장 인간적인 삶의 단면을 보이는, 소설의 제목처럼 피를 팔아 가족의 생계를 연명해나가는 주인공 허삼관으로부터 독자는 연민을 느끼고, 중국인과의 심적 거리를 좁히게 된다. 때문에 아프고 힘들었던 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이들에게 작품이 선대와 현대 사이, 그리고 한국과 중국 사이 하나의 역사적 공감대를 형성해준다.

 

실제로 매혈의 역사는 우리와 동떨어져있지 않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한국인들이 최후의 수단으로서 택한 것이 바로 피를 파는 것이었다. 1980년부터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매혈을 중단하였지만 암거래가 끊이질 않아, 넓은 의미의 장기 매매라며 법으로 금지한 것이 1999년이었으므로 매혈이 성행하던 시기로부터 불과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 한국의 매혈 역사를 우선 집약적으로 알아보면, 1975년 7월 당시 고재필 보사부 장관은 한국이 해마다 혈액 기근을 겪는 것은 국민의 공혈(供血) 정신이 부족한 데 있다고 지적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 “혈액 한 병이 위스키 한 병보다 싸서야 말이 되느냐”며 혈액 320㏄ 한 병값을 3500원에서 1만원으로 거의 세 배 인상했고, 이 조치에 따라 직업적 매혈꾼들이 큰 폭으로 늘었다. 특히 서울대와 고려대의 부속병원 등에서 채혈일이 되면 매혈자들이 몰려 이들을 정리하느라 병원 측이 애를 먹기도 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백병원 혈액은행에서는 피를 파는 사람이 1주일에 무려 60여명 정도였다고 한다. 피값이 오르자 공급은 늘고 수요는 줄어 병원마다 피가 남아돌 지경에 이르렀다.

 

경향신문 1960년 10월 5일자 지면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추석을 하루 앞둔 4일 경북대학부속병원 혈액은행에는 피를 팔겠다며 쇄도한 실업자들로 혼잡을 이루어 마치 매혈 시장 같은 느낌을 주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가난한 이들이 명절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매혈도 불사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처럼 매혈자는 한 끼라도 밥을 먹기 위한 절박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동아일보 1955년 6월 29일자에 실린 것처럼 피를 팔아 학비에 보태려는 고학생, 화장품을 사겠다는 학생도 있었다고 한다. 마치 허삼관이 수십일간 부실한 식사만을 하다가 배고픔에 지친 가족을 위하여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피를 팔았지만 불륜을 위해서도 판 것처럼 말이다.


매혈은 갖가지 사건 사고를 불렀다. 1978년 한국에서는 한 청년이 피를 판 돈으로 그날 술을 마셨다가 즉사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또 중국의 경우 한 다큐멘터리에서 그 심각성이 드러났다. "피 한 봉지에 6천 원씩 받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다들 피를 뽑아서 팔았죠. 그렇게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했어요. 매일 일을 해도 돈이 안 되니... 농촌에 돈 벌 데가 어디 있어요?" 중국 낙후된 지역의 농촌 사람들은 최근까지도 40-50번 정도 피를 팔고서 에이즈에 걸려 죽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매혈 탓에 배가 아파 먹을 수도 없고 간이 부어서 앉아 있기도 힘드며 설사, 기침, 어지러움이 매순간 동반된다고 한다.


피가 곧 돈, 즉 언제든지 다른 물품과 맞바꿀 수 있는 재산이 되는 비인간적인 공식이 성립하는, 존엄성이 보장되지 않는 시대를 허삼관은 아슬아슬하게 버텨냈다. 비인간적 시대를 살아내야만 했던 소시민의 비애는 크게 두가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시각과 사고의 편협화, 그리고 자신의 존재 의의 정립이 불가함으로 인한 무력감과 우울감이다. 허삼관과 그의 가족과 이웃들은 모두 국공내전과 대약진 문화혁명을 포함하는 중국 현대사의 피할 수 없는 흐름 속에 속해 있고 그로부터 압박과도 같은 영향을 받고 있는 개인들이지만 그들에게서 제대로 된 역사의식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이 정작 초점을 두는 문제들은 집안의 궁핍이 가장 우선, 급선무이다. 소시민적 문제들에 벗어나지 못하고 사회의 부조리함을 바꿀 생각조차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럼에도 잘 살아냈다, 하고 끝내는 감상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이 비극을 기억해야만 한다.


필자가 가상 인상 깊었던 부분인 작품 후반부에서 허삼관은 예순 살 노인이 되었고, 세 아들 모두 분가하여 가족을 꾸리고 여유롭게 살고 있었다. 이제 남은 여생 동안 할 일은 부인 허옥란과 함께 번 돈을 쓰며 즐겁게 생활하는 것뿐이었다. 더 이상 첫째 아들이 좋은 근무지에 배치 받도록 아들의 부대장에게 손이 벌벌 떨릴 만큼 큰 돈을 써서 술과 고기와 담배를 대접할 필요도 없었고, 그와 가족을 오래 괴롭혀왔던 가난이라는 불행은 이제 완전히 가신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생애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피를 팔기로 결심하나 아무도 노인의 피를 원하지 않고, 생애 처음으로 피를 팔지 못한 절망감에 빠진다. 눈물을 줄줄 쏟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발견하지 못하고 하루하루 벌어 쓰는데 급급해왔던 소시민의 비애가 선명히 드러났다고 생각했다.


격동하는 시대 속에서 위화는 고비를 억척스럽게 꾸역꾸역 넘기는 중국인을 목격했다. 아마도 위화는 기억하기 위해 이 책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그늘진 자리를 삶의 터전으로 삼아 꿋꿋이 살아낸 이들을 말이다.

 

(참고자료 출처: 서울신문 논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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