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서현의 독서 칼럼] 파리대왕, 제도 밖에서도 인간성을 유지한다는 것

핵전쟁이 일어나는 가운데, 영국인 소년들을 이송하던 비행기가 외딴섬에 불시착한다.  적게는 여섯 살부터 많게는 열다섯 살까지 되는 소년들은 문명에서 벗어난 곳, 어른들도 없고 규칙도 전무한 무인도에서 저희끼리 협력해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줄거리다.  무인도 생존기를 그린 소설과 영화는 셀 수 없이 많고, 그 주인공이 소년들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1954년에 발표된 윌리엄 골딩의 소설 <파리대왕>은 <15소년 표류기>나 <로빈슨 크루소>와는 다르게, 무인도에서의 모험과 생존을 위한 분투 자체에 집중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한 것 같다. 오히려 <파리대왕>이 초점을 맞추는 것은 소년들 사이의 위계와 서열 변화, 고립된 곳에서 커지던 갈등이 결국에는 광기로 번져 가는 모습이다. 읽기 전엔 막연히 <파리대왕>이 나 같은 학생들을 타깃으로 쓰인 모험 소설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건 전개와 세부 묘사가 꽤나 잔인하고 충격적이어서 놀랐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잘 풀린다. 리더가 된 열다섯 살짜리 랠프의 주도로 각종 규칙을 만들고 역할을 분담하며 생존해 나간다. 그러나 몇몇 소년들이 직접 목격했다는 '짐승'에 대한 뜬소문이 퍼지면서 무리에 급격하게 균열이 생긴다. 이때 새롭게 주도권을 잡게 된 소년이 잭인데, 이 책에서는 랠프와 잭의 대비가 무척 뚜렷하게 나타난다. 랠프는 '소라'를 불어 회의를 소집하고 아이들에게 발언권을 준다. 구조를 위해 봉화를 올리고 유지하는 것에 집중한다. 반면 잭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멧돼지를 사냥해 고기를 얻는 것과 소년들을 공포에 떨게 하는 짐승을 잡는 일이다. 잭이 리더가 되자 소년들은 급격히 광포해지는데, 자기 뜻에 따르지 않는 아이를 벌하고 강제로 굴복시키는 잭의 주도 하에 온갖 유혈 사태와 폭력, 심지어 살인까지도 일어나게 된다.

 

"돼지야."

"응?"

"그건 사이먼이었어."

"아까도 말했잖아?"

"돼지야."

"응?"

"그건 살인이었어."

"그만둬!" 돼지의 말소리는 날카로웠다. "그런 투로 얘기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니?"

그는 벌떡 일어나 랠프를 굽어보았다.

"그땐 캄캄했어. 게다가 그 지독한 춤이 벌어졌었고, 번개가 치고 천둥이 치고 비가 왔었어. 우리는 겁에 질려 있었어. "

"나는 그렇지 않았어."하고 랠프는 천천히 말하였다. "나는-난 내가 어땠었는가를 모르겠어."

 

잭은 분명히 권력욕이 있고 잔인한 소년으로 묘사되지만, 소년들 무리에서 살인까지 벌어지게 된 것이 잭의 천성 탓만이라고는 볼 수 없다. 과연, 잭이 리더가 되지 않았다면 소년 무리가 광기로 치닫는 일도 없었을까? 처음엔 분명 토의를 통해 규칙을 정하고, 멧돼지 한 마리를 잡는 데도 망설이다 결국엔 놓쳐 버리던 소년들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점차 멧돼지 잡는 데 익숙해지고, 사냥 후 모두가 모여 "멧돼지를 죽이자!"고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추는 의식을 통해 무인도에 갇혀 있다는 두려움과 막막함을 잊는다. 춤놀이를 하다 흥분한 상태에서 사이먼을 죽였을 때도 모두가 불편한 진실을 묻어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군다. 지난밤의 행위가 명백한 살인이었음을 인지하고 곱씹어보려 하는 건 랠프뿐이지만, 소년들은 그런 랠프를 떠나 살인을 주도한 잭의 무리에 자발적으로 합류한다. 랠프처럼 간밤의 행동을 되짚고 성찰하는 일이 찝찝함과 두려움을 주는 데 반해, 눈앞의 고기 파티와 춤놀이는 너무도 쉽고 즐겁기 때문이다. 잭이 그렇게 광포하게 구는데도 소년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순간의 즐거움을 제공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진정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지금 나 자신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일이다. 랠프가 그렇게 투표와 발언권을 강조했던 건, 효과적인 의사결정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폭력을 쓰지 않고 서로의 의견을 듣는 일, 스스로를 민주 시민이라고 여기는 일이 결국엔 우리가 인간성을 잃지 않게 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법과 제도를 벗어나서도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당연했던 일이 당연하지 않게 되는 극한의 상황에서 우리가 인간다운 행동을 할 수 있을지, 인간다운 행동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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