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서현의 독서 칼럼] 유원-우리가 그를 '생존자'가 아닌 한 개인으로 바라본다면

 

 

크고 작은 재난은 언제나 일어나고, 비극적인 사건 사고들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는 수없이 많다. 그러나 2020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인 <유원>은 재난 속에서 생존한 주인공을 '생존자'로만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한 소설이다.

 

열여덟 살 '유원'은 십여 년 전 인터넷을 달궜던 아파트 화재 사건에서 살아남은 아이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친언니는 불이 난 집 밖으로 탈출할 수가 없는 상황에서 원을 수건에 감싸 창문 밖으로 떨어뜨렸고, 지나가던 아파트 주민 아저씨가 온몸을 던져 어린 원을 받아냈다.  번져가는 불길에 숨을 쉴 수 없었던 언니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지고, 원을 받아낸 아저씨는 오른쪽 다리뼈가 산산조각나 장애를 얻고 직장을 그만두게 됐다.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목숨을 구한 원은 소문이 퍼질 대로 퍼진 좁은 동네에서 사람들의 동정하는 눈빛을 받아내며 성장한다. 당시엔 아기였기에  그날의 화재를 기억조차 하지 못함에도 언니와 아저씨의 희생으로 살게 됐다는 부채감에 계속 얽매여 있는 원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학교 선생님, 같은 반 친구들, 부모님까지 모두 자신을 신경써 주는데도 유원에게는 그 모든 것이 버겁다. 아마 자신을 친절히 대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그를 '유원'이라는 한 개인으로 바라봐주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 아닐까. 동네 주민들은 원을 보면 십수 년 전의 화재를 떠올리고, 부모님은 원의 모습에서 죽은 언니를 본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유원'은 비극적인 화재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생존자, 슬픈 과거를 딛고 꿋꿋이 살아가는 기특한 소녀, 이따금 잘 살고 있는지 궁금한 '11층 이불 아기'로만 존재한다. '생존자'라는 프레임 속 원의 개인적 특성은 지워지고, 배려받아야 마땅한 불행한 아이로서의 이미지만 남는다.

 

 "그들은 내가 웃을 때면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을 보는 것처럼 낯설어하고 약간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 행복을 바랐다면서도 막상 멀쩡한 나를 볼 때면 워낙 뜻밖이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듯 당황했다. "

(백온유, <유원>, 창비, 2020, p.84)

 

책의 중반부에서, 원은 놀이터 미끄럼틀을 타면서 소리지르고 웃던 아홉 살의 자신에게 "얘, 너는 그러면 안 돼."라고 말하던 동네 할아버지의 노여운 얼굴을 떠올리며 이렇게 서술한다.

"그 눈빛 안에, 네가 다른 애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자라려고 하면 될 것 같냐는 말이 숨어 있다고 느꼈다."

아무리 비극적 사건에서 살아남았대도 어떻게 어린애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지, 하며 인상을 찌푸리다가 별안간 나도 그 할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반부에서 원에게 일어났던 화재에 대해 알게 되고 나 역시 이 책이 원의 고통과 트라우마를 다루는 무거운 내용일 것이라고 막연히 예상했었기 때문이다.  유원이 화재 사건에서 생존했다는 이유만으로, "생존자"에 걸맞은 적당한 불행함을 기대하는 것은 분명 부당한 일인데도. 어쩌면 우리는 생존자들을 '불행해야 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유원>의 담담한 서술이 그동안은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우리 인식의 문제점을 되돌아보게 했다.

 

이 책은 주인공에게 일어난 비극적 사건에 집중하지 않고 한 개인으로서의 주인공을 조명한다.  "화재 사건 생존자"라는 틀에 갇혀 있었던 유원이 친구 수현을 만나고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감정에 솔직해지는 과정을 어느새 응원하게 된다.  유원의 성장을 따라가며 우리도 인식 면에서 성장할 수 있는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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