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서현의 시사 칼럼] 평등을 위한 루스 긴즈버그의 발걸음

2020년 9월 18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긴즈버그 대법관의 이름은 전에도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왜 유명하고 어떤 일을 했는지는 몰랐는데, 미국 전역에서 애도의 물결이 일었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그녀의 일생에 대해서도 알아보게 되었다. 법조계에 관심이 있다면 물론이고, 혹 관심이 없더라도 긴즈버그의 당당함과 역경을 헤쳐온 삶의 자세는 우리에게 큰 깨달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 이 칼럼에서 소개하려 한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1993년에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되어 27년 동안 연방대법원에서 판결을 내려온 법조인이다. 굵직한 사건들을 다루며 거의 언제나 여성, 장애인을 비롯한 소수자의 편에 서왔다. 특히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군사학교에 남학생만 입학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판결했던 사건이 지금까지 회자될 정도로 유명하다.(인용: 네이버 지식백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원이 명령했듯이, 기회의 문을 관리하는 정부 관계자들은 '양성의 역할과 능력에 대한 고정관념'에 기초해 적격한 개인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1996년 6월 26일, 연방정부 대 버지니아 사건 판결문에서(인용: 헬레나 헌트,<긴즈버그의 말>, 마음산책, 105p)

 

이 판결이 나온 시기가 1990년대 후반임을 생각하면, 그 당시엔 상당히 급진적인 견해였을 텐데, 긴즈버그는 여성에게도 군사학교 입학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해 개인적 생각을 판결문에 반영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렇게 성차별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위해 애써온 그녀의 가장 유명한 한 마디를 꼽으라면, 단연 "나는 반대한다(I dissent)"일 것이다. 대법원의 판결이 차별적이라고 생각할 때마다 "나는 반대한다"라고 외쳤는데, 이 말이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자신의 소신을 지킬 수 있었던 건, 루스 긴즈버그 본인이 유대인이자 여성으로서 법조인이 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컬럼비아로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로펌에 입사하려 했지만 여성이라서 거절당한 긴즈버그는 대학에서 '법이 허락하는 성차별'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며 직접 소송을 맡아 진행했다고 한다. 1973년 '프론티에로 대 리처드슨 사건'에서는 기혼 남성들이 지급받는 주택 수당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지급받지 못한 공군 소위를, 1975년 '와인버거 대 와이젠펠드 사건'에서는 홀로 아이를 키웠지만 남자라서 양육 수당을 지급받지 못한 아버지를 변호하는 등(참고: 언중위공감지기 블로그, [일상다반사]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그녀는 누구일까?), 성차별 극복을 위해 애쓰고 소수자들을 대리하며 법조인으로서 자신의 소신을 지켜 왔다.

 

이렇게 힘들게 걷게 된 법조인의 길에서 사회적 차별 철폐를 위해 애써 왔다는 사실이 긴즈버그 대법관을 더욱 특별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다. 어렵게 쌓아온 법조인 경력을 안전하게 지키고 싶었을 법도 한데, 루스 긴즈버그는 사회적 문제에서 소수자의 편에 서면서, 아무도 자신의 의견에 동감하지 않아도 당당하게 '반대한다'고 외칠 수 있었던 분이었다. 사회적 소수자의 인권이 보장되지 못했던 시절, 한 대법관의 소신과 용기가 차별받고 숨어야 했던 소수자들을 바깥으로 이끌었다. 긴즈버그의 일생을 다룬 책과 영화가 많으니 한 번쯤 찾아보며 루스 긴즈버그라는 인물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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