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연우의 독서 칼럼]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읽고

삶 속에서 권태로움을 느끼던 나에게 이 책은 한 줄기의 희망처럼 다가왔다. 카뮈의 책은 이방인 이후로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철학적인 사상이 많이 담겨있어서 놀라웠다. 그리스로마신화를 차용하여 작성한 이 소설은 우리에게 행복한 시지프스를 상상해야한다고 말한다. 이 대목에서 매력을 느끼게 되었고 이 내용을 함께 나누고자 글을 쓰게 되었다. 

 

첫 소제인 부조리와 자살에서는 자살이 부조리를 해결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 책에서 자살은 부조리를 ‘피하는’ 방법으로 본다. 권태는 기계적으로 반복해 온 습관을 끝내지만, 그와 동시에 의식을 시작한다. 한번 삶의 무기력을 깨달은 사람들은 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 그러면 그들에게 남은 선택 두 가지는 자살 혹은 자살하지 않는 것이다. 책에서는 자살과 회복이라고 표현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두려움을 스스로 자각하고 나면 두려움은 고뇌가 되고, 명철해진 인간의 영원한 환경으로 변화하게 되고 그 속에서 실존이 다시 발견된다고 말한다. 인간의 실존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인간 자체보다도 더 근원적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위대성은 삶에 대한 의미를 자각할 때 생겨난다. 만약 인간이 무한한 삶을 살았다면, 과학이나 기술은 지금과 같은 수준으로 발전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더욱 윤택한 삶을 위해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발전한다.

 

키르케고르의 종교를 통한 구원과 셰스토프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대한 해결을 카뮈는 진정한 해결이라고 보지 않는다. 또한, 기존의 실존 철학은 탈주를 권하고 무력함에 대한 고백일 뿐이라고 말한다. 셰스토프는 인간 판단에는 해결책이 없으며 신에게 우리를 내맡기라고 한다. 부조리의 확인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선상에 둔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신앙인은 자신의 패배 속에서 승리를 찾는다고 주장한다. 불합리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달아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이에 카뮈는 이것들은 인간에 의한 해결책이 아니며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괴로운 질문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환상에서 살아야 한다면, 차라리 절망을 채택하겠다고 한다. 신의 뜻이 아닌 인간에게 모든 주체적인 결정권을 준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실존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다른 책과 달리 독특하게도 이성이 부조리의 고뇌를 진정시킬 힘이 없다고 말한다. 그럼 우린 어떤 방법으로 부조리의 고뇌를 극복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이 책이 전체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된다.

 

역사 속을 지나다 보면 온갖 종교나 예언자들이 부조리의 인간에게 비약할 것을 요구한다. 책 앞부분에서는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묻고 뒤로 갈수록 인생의 의미가 없으면 없을수록 더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산다는 것은 부조리를 살리는 일이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일이다.

 

 

카뮈는 부조리한 사회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크게 3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로, 카뮈는 해결책으로 반항을 제시한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과 끊임없는 대결이며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반항은 인간에게 삶의 가치를 부여하고 인간의 지성이 자신을 넘어설 기회를 준다. 반항과 자살을 계속해서 비교해서 제시하고 있는데 반항은 부조리를 직시하는 것과는 달리 자살은 부조리와 화해하지 않고 죽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나날의 의식과 반항을 통해서 운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자신의 유일한 진실을 증언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책의 첫 번째 귀결이다.

 

둘째로, 자유에 대한 개념을 들 수 있다. 희망과 미래가 없다는 것은 인간의 행동 가능성이 더욱 증대됨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한계가 있기에 인간이 열정을 가질 수 있듯이 말이다. 부조리를 인식한 이후 인간은 진리를 성립시킬 수 있는 유일한 토대인 ‘존재’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에 가장 대표적인 예시는 고대의 노예들인데, 그들은 자유로운 결정권을 갖지 못하였지만. 책임을 갖지 않는 자유를 가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열정을 제시한다.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많이 사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인간의 의지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의지의 반대인 죽음에 달려있다는 말처럼 현재가 부조리 인간의 이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카뮈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러한 부조리의 추론보다는 시지프 신화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지프에게 내린 형벌은 쉬지 않고 바위를 굴려 산꼭대기까지 올리는 것이다. 하지만 올려진 그 바위는 바위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다시 떨어진다. 하지만 시지프는 부조리한 영웅이라고 볼 수 있다. 바위가 산꼭대기에서 떨어지고 내려오는 그 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그의 바위보다 우월하고 강하다. 카뮈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삶을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해야 한다.

 

실존주의는 개인들이 자신을 착취하고 극한의 상황으로 몰아가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우리를 돌아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카뮈의 시지프신화는 조금은 어려운 말로, 하지만 철학적인 말로 내용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또는 자신의 삶 속에서 권태로움을 발견한, 사회가 규정한 나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당신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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