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애의 사회칼럼 4] 나 스마트폰...없다


우리는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무언가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 차 있다. 일어나서 점검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잠잘 때까지도 손을 놓지 못한다. 이것에 집착할수록 우리는 더 아파져만 간다. 청소년 3명 중 1명이 이것에 중독되어 살아간다. 그리고 이것에 의한 사고는 계속해서 늘어나가기만 한다.


그렇다. 우리는 스마트폰이라는 것에 의해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 스몸비(스마트폰+좀비)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스마트폰의 폐해는 늘어나고 있다. 그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도, 진정한 소통을 할 수도 없다. 모두 스마트폰 속 자신의 세상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세상은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개인적인 공간이었다. 가족들이 함께 TV를 보는 시간에도 각자 스마트폰을 들고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있다. 개인을 위한 공간은 사람을 더 외롭게 만들었다. 소통할 방법(SNS)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진정한 소통(疏通)은 어려워지게 되었다. 소통이 어려워지면서 ‘공동체’라는 단어는 점점 어색해져만 갔다. 스마트폰으로 보느라 고개를 숙이고 다니기 때문에 우리는 더는 주위에 아름다움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소통이 어려워지고, 아름다움이 사라져 갈수록 우리는 더 아파져 갔다. 이러한 아픔의 시대에 우리는 ‘사람’답게 살아가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는 사람이다. 사람은 ‘살+암(명사화, 접미사)’, ‘사랑’, 또는 ‘살다’로 정의될 수 있다. ‘살+암’이란 살아있는 것 중에 으뜸이라는 뜻이다. 인간이 동물이라고 불릴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창조적 활동을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창조적 활동은 대뇌피질 속 뉴런에서 시작된다. 대뇌피질 속에는 약 1천억 개의 뉴런(neuron)이라는 뇌 신경 세포가 존재한다. 뉴런은 서로 전기신호를 주고받는데, 이를 시냅스(synapse)라고 부른다. 시냅스는 약 1천조 개에 이르는 뇌세포와 세포 사이의 전기적 신호를 연결하여 뇌가 활동하도록 하는 뇌 신경 세포들 사이의 변화하는 집합체다.

이를 위해 시냅스는 신경전달물질이라는 단백질 10만 개를 운반한다. 시냅스는 우리가 인지하고 생각하고, 경험하고 행동하는 것을 통해 연결된다. 우리가 영상을 보고 있을 때 시냅스는 반응한다. 영상을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접하면 시냅스가 영상에 습관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이를 ‘시냅스의 가소성’ 이라고 한다. 시냅스의 가소성은 자기가 즐기던 것을 뇌가 계속 하려 하고 자기가 즐기는 쪽으로 뇌가 계속 발달하려는 성향이다. 우리가 게임에 자극을 계속 받으면 시냅스가 이를 계속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신이 즐기는 일을 뇌가 안다. 이 자극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우리의 뇌 속 시냅스가 달라진다.


사람은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 각 사람은 10,400분의 1의 초미세 확률에 해당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들이다. 각각의 정자와 난자는 만나기까지의 엄청난 과정을 거친다. 정자 하나가 만들어지기 위해서 약 100번의 세포분열과정을 거쳐야 하고, 난자 또한 적어도 30번의 분열과정이 필요하다. 정자와 난자는 다시 자식이라는 ‘형이하학적’ 속성을 가진 ‘나’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10,400분의 1의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다양한 10,400분의 1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 있으므로 내가 존재할 수 있다. 결국에는 ‘너’가 존재하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나를 위한 행위다. 나는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소통’한다. 또한 ‘소통’하기 위해서 ‘사랑’한다. 스마트미디어 시대로 인한 ‘소통’의 단절로 우리는 ‘사랑 ’하기가 어려워졌다. ‘사랑’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답게 살아가기가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사람은 산다. 사람의 어원은 ‘살다’라는 동사라고 한다. 사람이라는 단어형성은 ‘살다’의 ‘살아갈 줄 아는 것’의 의미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살다’라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살면서 삶을 변화시키며,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존재다. 무엇보다 우리는(청소년) 자라나는 과정에 있다. 사람답게 자라나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 우리는 배우기 위해서 지식을 입수하고, 정리하고 표현한다. 그러나 이 배움의 과정을 멈추는 것이 있다. 스마트폰을 계속해서 하게 되면 시냅스의 가소성으로 정리하거나 표출하지 못하게 된다. 스마트폰으로 인해 전두엽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입수하지만 정리하고 표출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가 배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폰을 디자인한 애플사의 수입과 이를 조립한 중국의 수입을 보면 알 수 있다. 중국은 애플이 시키는 대로 조립해 5원의 수입을 얻는다. 그리고 애플은 디자인한 값으로 엄청난 수입을 한다. 디자인은 전두엽을 사용함으로 정리하고 표출될 때 가능한 것이다. 지식을 정리하고 표출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더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 알아내는 것이 힘이다. 우리는 천조 개의 시냅스가 활동하기 때문에 창조적인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스마트폰으로 창조적인 활동을 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입수하지만 표출하고 표현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지식은 살아있는 지식이 아니다.



나는 고 2지만 한 번도 스마트폰을 가져본 적이 없다. 누구나 가졌다는 핸드폰을 가지지 못한다는 한 마디는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때로는 아이들과 공감을 하지 못하고 혼자가 될 때도 있었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하고 있는 데 없다는 이유로 아웃사이더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핸드폰이 없어 힘들고, 어렵고, 불편했지만 이 불편함은 나를 자라나게 했던 것은 분명하다.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졌다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흐름 속에서 나는 나에게 스스로 특별하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보고 있지 않았기에 고개를 들고 사람을, 자연을 볼 수 있었다. 그들과 더 깊은 내면의 대화를 할 수 있었고, 그럴수록 나의 내면은 강해지는 것 같았다. 혼자만의 시간을 견뎌내는 것은 나를 강하게 하고, 몰입하게 했다. 이는 나만의 새로운 것들을 창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미국의 유명한 그림책 작가 모리스 샌닥에 대해서 평론가들은 그의 어린 시절의 외로움이 그림책의 상상력과 창의력의 근간이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나의 길을 간다는 것은 멋쩍고, 뻘쭘하고, 때로는 이해받지 못하지만, 더 가치 있는 것을 고개 들어 볼 수 있게 만든다. 보는 것을 닮아간다는 말이 있다. 가치 있는 것을 바라보면 내가 가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하며, 창조하며, 변화하며 살아가는 존재다. 사람다움이 사라져가는 스마트 미디어의 시대 속에서 같이 더 가치 있는 길을 걸어가자. 스마트폰의 힘을 빌려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힘으로 살아내는 것이 필요하다. 내 힘을 기를 때 비로소 자신을 알아 진정한 가치를 찾아갈 수 있다.


출처: 정용석, <나는 누구인가>, 21세기 북스(2014), p216.



칼럼 소개 : 사회.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힘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더 알아가기 위해 사회란 분야의 칼럼을 쓴다. 사회는 내가 어떻게 살 것이고, 이곳에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스토리다. '사회'라는 세상의 스토리를 읽으며 한쪽 눈을 뜨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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