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서의 인문학 칼럼 4] 덕(德)은 무엇인가

장자는 말했다. ‘재주는 빨랫줄에 걸린 속옷과 같고, 덕은 장롱 속에 넣어둔 속옷과 같다.”
[시 : <덕은 무엇인가>-장자 : 中]

이렇게 덕은 쉽사리 범접하기 어렵고, 또 그 실재를 알기 어렵다. 우리는 ‘덕’의 보편적인 얼굴을 알고 있지만, 과연 진정한 ‘덕’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뜨거운 감자이다. 과연, ‘덕’을 정의 내리는 기준이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참된 앎, 즉 지식을 덕이라고 보았다. 악을 행하지 않도록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수 있는 자세를 중시하였고, 올바른 앎이 덕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의 유명한 말, ‘너 자신을 알라.’의 말을 통해 무지에 대한 자각을 강조하였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하며 참된 앎을 깨우친 사람은 반드시 ‘덕’을 행할 것이라고 믿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은 중용과 앎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정의 내렸다.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그저 앎으로는 결코 덕은 행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조난위기에 처한 선박에 있다고 가정하였을 때 자신의 식량을 다른 이들과 나누어야 함이 올바른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정작 실천에 옮기지 않는다면 그 자는 ‘덕’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앎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실천과 의지가 더해지고, 좋은 습관이 형성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즉, 실천적 지혜에서 선과 악, 그리고 중용을 배운 후 실천 의지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현대사회에서도 ‘덕’에 관한 시사점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왜 많은 정치가는 옳고 그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심지어 ‘덕’ 그 실재에 대해서도 책을 편찬할 만큼 다양한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를 실천하지 않는가? ‘덕’은 그만큼 접하긴 쉽지만,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엔 어려운 것이다. 이 세상엔 이해타산이나 개인의 이기심 등 인간의 본성과 같은 무언가가 존재하는 이상 ‘덕’이 이상처럼 잘 실천될 수 있다는 주장엔 모순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는 앞서 수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외쳤던 ‘덕’을 보편성을 지나치게 넘지 않는 선 안에서 해석하려 노력하고, 그를 행할 수 있어야 진정한 덕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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