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으로써 나라를 수호하신 독립운동가와 그들의 시 Ⅱ

한용운의 생애와 그의 시

한용운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후 향리에서 훈장으로 학동을 가르쳤다 홍주에서 전개되었던 동학 농민전쟁과 의병운동을 목격하고 1896년 홀연히 집을 나서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섰다. 그곳에서 불교의 기초지식을 섭렵하면서 수도하다가 노령 시베리아 등지를 여행하기도 하였다. 귀국 후 1905년 다시 설악산 백담사로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고 연곡선사를 은사로 출사하여 승려가 되었다.

1910년 당시 모순과 부패가 만연하던 한국 불교의 상황을 개탄하면서 개혁방안을 제시한 실천적 지침서인 ‘조선불교 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하였고 1913년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에 일대 혁신 운동을 일으켰다. 1914년 방대한 고려대장경을 독파하고 ‘불교 대전’을 간행하였으며 1918년 본격적인 불교 잡지 ‘유심’을 발간하였다. 1919년 천도교, 기독교, 불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추진된 전국적이고 거족적인 3.1운동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불교계 측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도 맡았었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한용운에게 간단한 식사를 부탁하였고 한용운은 “오늘 우리가 집합한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러운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이와 같은 선언을 하게 되어 그 책임이 중하니 앞으로 공동 협심하여 조선독립을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하였다.

 

1921년 12월 21일 석방된 뒤에도 한용운은 굴하지 않고 민족운동을 계속하여 갔다. 1922년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된 물산장려운동을 지원하고 1923년 조선 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2월에는 좌우합작 민족 협동전선으로 신간회의 창설이 추진되자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항일단체에서 적극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나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와해하였다. 당시 운영난에 빠진 ‘시대일보’를 인수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속간하면서 불교 대중화와 민중계몽, 민족의식 고취에 힘썼다.

 

1933년 한용운은 벽산 스님이 기증한 지금의 성북동 집터에 심우장이라는 택호의 집을 짓고 입적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총독부 청사가 보기 싫다는 이유로 동북 방향으로 집을 틀고 살았다. 일제 말기 총동원체제 아래 자행된 황민화 정책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한용운은 민족적 의지를 꺾지 않았다. 그리하여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1940년 창씨개명 반대 운동, 1943년 조선인 학병출정 반대 운동 등을 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용운은 1944년 6월 29월,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눈앞에 두고 눈을 감았다.

 


님의 침묵 /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은 연구자에 따라 조국, 민족, 불타, 중생 등 다양한 형태로 해석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암흑 같은 당대의 한계로 인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조선의 독립을 갈구하는 자신의 심중을 은유적 수법으로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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