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수의 생명과학 칼럼] 해마다 광복절 무렵이면 내게 떠오르는 생각

강제동원된 증조부님과 뇌졸중 후 치매로 고생하던 증조모님에 관한 단상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75주년 광복절이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내세워 한국에 경제보복을 가한 것이 작년 7월이었고, 이후 약 1년 동안 우리가 꿋꿋하게 대처하고 있는 가운데 다시 맞게 되는 광복절이니만큼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게는 이 무렵인 7월과 광복절에 또 하나의 의미가 있다. 해마다 이 무렵이면 일제의 강제동원으로 1945년 7월경에 희생되셨다는 나의 증조부님, 그리고 그 충격 때문에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신 증조모님의 비극이 떠오른다. 이런 비극은 나의 가족사에 그칠 수도 있겠지만, 아마 많은 한국인들이 엇비슷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 이미 지난 역사인 만큼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용서와 화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과거의 쓰라림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서야 미래에 그런 불행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런 목적에서 내 증조부님과 증조모님의 일화를 다음처럼 언급하고 싶다.

 

사실 증조부님에 관한 이야기는 초등학교 시절 친할아버지로부터 처음 들었고, 이후에도 귀가 따가울 정도로 수없이 반복해서 들었다. 나의 증조부님은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애써 일거리를 찾았지만, 고향에서는 전혀 가능성이 없자, 큰마음을 먹고 일본으로 건너가셨다고 한다. 증조부님은 세탁소를 운영하셨는데 그곳이 일본 오카야마(岡山, 강산) 시였다. 할아버지도 1940년 그곳에서 태어나셨다. 그런데 어렵게 정착하신 뒤 몇 년쯤 지났을까 행복은 잠깐이었다. 시절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 통반장 역할을 맡았던 증조부님에게 동네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집요하게 요구했지만, 증조부님이 순순히 응하지 않자, ‘여기, 말 안 듣는 조센징이 있다.’고 누군가 밀고를 하였고 결국 해군의 군속으로 징집하는 영장이 이내 증조부님께 도착하였다고 한다.

 

증조부님이 그렇게 강제로 끌려가셔서 약 2달간 대기하시던 곳이 오카야마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라서, 증조모님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아이들을 데리고 몇 차례 면회를 하러 가셨다고 한다. 증조부님이 그렇게 대기하시던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어떤 신분으로 끌려가셨는지 사실 할아버지조차 오랫동안 한스럽게 궁금해하실 뿐 잘 모르고 계셨었는데, 약 10년 전쯤에야 강제징용 혹은 강제징집된 조선인 명부가 추가로 공개되었고 그 자료를 확인하고서야 증조부님이 끌려가셨던 곳이 ‘구레 진수부(吳鎭水府, 오진수부)’였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구레(吳, 오) 시는 오카야마의 서쪽 100km쯤 위치한 곳으로 태평양 전쟁 중 일본 해군의 가장 큰 해군기지가 위치한 곳이었고, 핵폭탄이 떨어진 히로시마 바로 밑에 위치한 곳이었다.

 

구레로 면회를 온 증조모님에게 증조부님은 ‘내가 이번에 가면 아마 살아 돌아오기 힘들 것이다. 어렵겠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열심히 살고, 다만 개가(改嫁, 재혼을 말함)는 하지 말아라.’고 당부하시며 증조부님 당신의 손톱, 머리카락 자른 묶음을 건네주셨다고 한다. 증조부님은 죽음을 예감하고 계셨는데 조만간 ‘남방군도’의 부대에 배치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렵에는 미군이 필리핀을 점령함으로써 아직 일본이 점령 중인 남태평양 일대의 섬들을 가리키는 ‘남방군도’와 일본 본토 사이의 연락이 단절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바다에 가득한 미국 군함과 잠수함을 피해 증조부님이 탄 배가 목적지인 남방군도의 어딘가에 일단 도착할 가능성이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증조부님이 배를 타고 떠나신 후 얼마 되지 않아 그 배가 미군 잠수함에 격침되어 증조부님도 사망하셨다는 통보가 증조모님 앞으로 도착하였다.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증조모님은 머리를 움켜쥐시고 바로 쓰러지신 뒤 며칠 뒤에야 어렵게 깨어나셨는데 그때부터 내내 언어장애를 보이셨다고 한다. 가장을 갑자기 잃은 슬픔을 넘어서 정신이 거의 황망해지셨고, 일본에서 애써 일구었던 재산을 전혀 거두지도 못하시고 한국 땅으로 돌아오셨기 때문에 증조모님과 할아버지 등은 줄곧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오셨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증조모님은 내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시면서 오른 손발을 제대로 거동하지 못하는 증상을 보이셨다. 더 나아가 점점 상황이 안 좋아진 부분은, 증조모님이 아주 젊은 나이셨음에도 몇 달 뒤부터 전형적인 치매 증상까지 보이셨다는 점이다.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하시거나 뚜렷한 이유도 없이 쉽게 분노하셨고 때로는 대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해 옆에서 수발하던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 등 가족들의 고통이 여러모로 극심하셨다. 그렇게 아프신 데도 가족들의 수발 덕택인지 증조모님은 제법 오랫동안 생활하시다가 한참 나중에야 돌아가셨다. “죄받을 생각인지 모르겠다면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수발하는 것은 다시 하라면 절대 못 할 짓이다.”라고 할아버지는 내게 여러 번 말씀하신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나의 증조모님이 겪은 병증, 그리고 수발하시던 할아버지의 고통을 전해 듣고 증조모님의 병환이 무엇이었을까 어려서부터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편이 되는대로 인터넷 자료에서부터 관련 서적까지 샅샅이 훑어본 뒤에야, 증조모님이 증조부님의 소식을 접한 충격으로 뇌졸중을 겪으셨고 이후 나타난 치매는 다름 아니라 혈관성 치매에 해당한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알츠하이머 다음으로 치매의 중요한 원인인 혈관성 치매는 뇌혈관이 터져 생길 수 있고 노인과 청년을 가리지 않는다.

 

강제동원 중에 돌아가셨다는 증조부님은 일제에 의한 직접적인 희생자에 해당하고, 충격으로 뇌졸중이 생겨 결국 치매로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증조모님은 간접적인 희생자에 해당할 것이다. 일제가 아니었더라면 어쩌면 행복한 부부의 삶을 누리셨을 증조부님과 증조모님의 비극이 해마다 7월 무렵이면 내 머릿속에 떠오르곤 한다. 증조부님이 돌아가시고 증조모님이 처음 쓰러지셨다는 때이다. 장차 우리가 일본과 화해의 길을 걷게 되더라도 미래에 우리 자신이나 후손들이 다시는 비극을 겪지 않으려면 아픈 과거사를 꼭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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